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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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단편소설

어느 연구소 이야기 (4)

조용한 3류 2017. 9. 1. 00:03


(4)


연구원들을 일 년 내내 연구비 확보에 매달리게 한다는 PBS 등에 대해 답하는 사이, 시간은 꽤 흘러갔다.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서는 기초기술, 원천기술 연구가 힘들다고 하던데요, 연구하신 분야가 그쪽 아닌가요? 어떠셨나요?”


“모험적인 성격이 무척 강했지요. 처음 과제 제안할 때 연구 기간을 5년으로 했는데 과제 선정됐을 때 보니 3년으로 줄어 있어요. 깜짝 놀라서 알아보니, 이 기술은 워낙 변화가 많은 분야이니만큼, 3년 해 보고 그때 가서 다시 방향을 설정하자고 했다는군요. 말은 맞지요. 하지만 3년 후에 과제 평가할 때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뜩이나 보여줄 만한 결과가 없냐고 다그치는 판인데……. 결국 원천성, 모험성이 강하단 이유로 오히려 과제 기간만 짧아졌지요.”


“연구기간이 길어야 할 과제가 오히려 짧아졌군요. 어떻게, 연구 결과는 좋았습니까?”


“과제 특성에 맞게 연구는 했지만 뭔가 보여줄 만한 게 없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사실, 서박사님을 소개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연구소 그만두실 때 게시판에 올린 글이 있다고. 그걸 보내주시겠다고 했는데, 며칠 전에 갑자기 전화가 오더니만 그냥 서박사님한테 직접 들으라고……. 유능하고 인기도 있으셨다고 하던데요. 이직할 직장도 알아보지 않고 그만두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하. 어느 분입니까? 무능하고 인기가 없으니 이러고 있겠지요. 게시판의 글이 궁금하시면 제가 보내드리지요. 뭐 별 게 없습니다. 그냥 지쳤습니다, 모두에게. 연구소, 부서, 같이 한 사람들, 모두.”



“혹시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수행 중인 사업이 평가에서 탈락됐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신규사업이 됐으니 우리 부는 별 문제 없을 겁니다. 그러면, 좀 있다가 모두 송년회에서 봅시다.”


이렇게 2002년 마지막 팀장회의는 끝을 맺었고, 나는 부장실을 앞서 빠져 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흡연실로 걸음을 옮겼다.


송년회를 하는 음식점에는 이미 많은 부원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T부장, 팀장들과 같이 자리를 잡았고 인사말, 술잔 돌리기 등 의례적인 술자리가 이어져 갔다. 몇 군데 술잔을 돌리고 오니, 모두들 그러고 있는지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술을 한 잔 따르고 죽 들이키는데,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귀엣말로 물어왔다. 


“근데, 서박사. 우리 부 사업이 탈락됐다며? 우리 부도 날아가는 것 아냐?”


그러는 사이 다른 팀장과 과책들이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술잔을 들고 막 자리에 앉는 S박사에게 물었다.


“하나 물어 봅시다. 신규사업 내용이 뭐요?”


“저희도 모르겠어요. 그 돈을 어디다 쓰려는지, 연구 아이템도 바닥났는데. 그래도 계속사업이 탈락됐는데 신규가 됐으니 정말 다행이지요. 아니었으면 큰일 나는 것 아녜요? 지금 다른 부 사람들은 우리 부 얘기를 고소하게 하고 있던데…….”


나는 잠시 동안 멈칫하다가 이내 술을 한 잔 따라 다른 팀장과 과책들에게 원샷을 청했다.


“과책들이 과제 내용을 모르면 어떡하나?”


“이런저런 내용들을 드렸지만 어떻게 제안서를 작성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꼭 필요하지도 않은 과제를 신청했단 말인가? 남들은 과제가 없어 야단인데……. 아무리 부장님이 알아 하신다 해도 알 건 알아야지…….”


과책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이미 팀 회의에서 강조한 탓에 S박사의 팀원 평가 결과를 그대로 수용한 게 후회가 됐다. 이윽고 T부장이 술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에 송년회는 끝나고,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2차를 향해 흩어져 갔다. 술도 과하게 마신 것 같고 별로 2차에 끼고 싶지도 않아 귀가를 선택했는데, 마침 T부장도 상당히 취한 것 같아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그는 나보다 더 취해 있었다. 나는 T부장을 부축하여 그의 집 방향으로, 간간히 남아 있는 눈을 피해, 서로 비틀거리면서도 그냥 앞뒤 맞지 않는 얘기를 나누면서 골목들을 걸어 내려갔다. 


“서박사, 미안해요.” 


힘겹게 부축하여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서는데 그가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나는 아무런 대답을 안 했다. 그는 계속 같은 말을 되뇌더니 마침내 한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서박사, 미안해!” 그 바람에 그는 넘어졌고 나도 따라 바닥에 뒹굴었다. 힘겹게 T부장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를 바래다주고는 술을 깰 겸 연구소까지 걷기로 했다. 술기운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연구단지의 공기는 차갑게 식히다 못해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그는 나를 이어 태스크포스 팀장을 했고 바람직한 연구소에 대해 의견도 많이 나누었다. 몇 살 위인 T부장을 나는 장난처럼 형이라 불렀고 같이 술도 많이 마셨다. 그가 애써 사업을 따오고도 다른 이가 부장이 되어 힘들던 시절이 있었다. 단장의 바람과 달리 소장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 후 단장은 모든 일이 점점 꼬여가면서 내게 푸념까지 했다. 나는 그런 단장을 위해, 아니 우리 연구부를 위해 몇몇 과책들을 만나 부장 교체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기도 했었다.


나는 도리질 치다가 연구소 정문 앞에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늦은 밤에 누구일까, 노려보던 경비 아저씨가 얼굴을 알아보고는 반색을 했다. 아저씨의 웃음을 보니, 작년에 사무실까지 찾아 와서 사람 뽑아 주겠다고, 이런 패기 있는 팀장이 좋다고 웃던 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사람은 뽑지 못했다.


경비 아저씨에게 담배를 하나 권하고는 화단에 앉아 불을 붙였다. 반년 후면 과제가 종료되는데 후속 과제는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지난번 신규과제 공모 때도, 후보군에 T부장 과제, 전임 부장 과제와 같이 있었다. 세 과제가 다 공모로 나갈 수는 없었다. 전임 부장이 옮겨간 다른 연구단에 대한 고려도 문제였고, 근래 줄기세포 분야의 성과로 인해 IT-BT 융합 연구가 의료로만 경사되어 있는 것도 문제였다. ‘서박사, 미안해. 서박사, 미안해!’ T부장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람 100명에 밥 100그릇이면 천천히 걸어가도 될 텐데, 그도 역시 ‘있어도 착한 사람’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