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변명사(辨明士) (5), (6) 본문

글/단편소설

변명사(辨明士) (5), (6)

조용한 3류 2015. 1. 16. 13:15

(5)

길 위의 영혼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죄의식이 예민해진 영혼들은 다소곳이 변명사들의 변명을 들으며 조용히 산책하고 있었지만, 변명하기에 바쁜 영혼들은 자기변명을 들어줄 영혼들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셋을 수군거리며 쳐다보는 영혼들은 많았다. 이게 다 방영*과 채혁*이 몇 날 며칠을 음산하게 울거나 고래고래 울부짖은 덕이리라.

 

멀리서 빤히 쳐다보던 한 영혼이 서서히 다가왔다. 변명사인 내 눈에는 그의 잘못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방영*과 채혁*에게 간단히 귀띔해주었다. 출장에 동행했던 젊은 부하 여직원을 밤중에 자기 숙소로 불러서 성추행을 했었다고.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는 더없이 불쾌하다는 탄식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슬그머니 다가오던 영혼은 그 탄식만으로도 이미 우리 셋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그게 아니에요……" 하며 가까이 왔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고 사실은 이래요."

 

꼭 이런 영혼들은 '……습니다'를 피한다.

 

"사실은 제가 그날 너무 취했었어요. 전혀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취중에 그 여직원을 첫사랑으로 착각했던 것 같애요. , 나도 주책이지. 이 나이에 아직도 첫사랑을 못 잊다니. 그 사나운 욕심만 난무하는 이 약아빠진 세상에서. 근데 난 무얼 했는지 아무 기억이 안 나요. 혹시…… 내가 첫사랑한테 했던 걸 그대로 했을까요? 누구 하나 없는 끝 모를 밤길에서 했던 걸? 그렇다면…… 다정한 대화와 부드러운 입맞춤? , 아무 기억이 안 나. 만약 나를 비난한다면 내 순수함과 내 순정을 비난해주세요."

 

우리 셋은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듣고는 다시 걸었다. 그러자 그 영혼도 다른 이들을 찾아 다시 떠나갔다. 우리 셋은 여전히 말없이 걷고 있었다. 길가의 바위 위에 있는 세 영혼이 보였다.

 

"…… 우리가 걔한테 전화를 걸지는 않았지."

 

", 그때 걔 힘들었어. 그런 애한테 어떻게 전화를 거냐?"

 

"난 걔한테 메일 보내면서 그 얘긴 한 마디도 안 꺼냈어. 괜히 아픈 상처 건드릴까봐."

 

세 영혼이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그 얘기가 끝나자 똑같은 대화를 반복했다. 바위 옆에 있던 변명사들은 그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가끔은 한밤중에 깨어서도 저런다고 했다.

 

갑자기 방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내게 소리를 질렀다.

 

"변명사님, 대체 우리를 왜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까? 저들처럼 그냥 변명만 하라는 건가요? 죽어서까지 저렇게 추하게 자신의 죄를 감추라는 겁니까?"

 

채혁*도 옆에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방영*은 내게 간절하게 원했다.

 

"이런 산책은 의미가 없어요. 전 제 잘못을 뉘우치고 싶습니다.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 저 영혼들처럼 타락하라고 하지 마십시요."

 

방영*의 소리가 하도 컸던 탓에 여기저기서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던 영혼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여전히 처음 약속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 영혼이 방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이승의 나이로 보면 내가 위였으니까 점잖게 타이르겠네. 자네 너무 괴로워말게.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우리 땐 집집마다 그런 일 없는 집이 없었다고. 전쟁 중에 다쳐서 죽고, 억울하게 끌려가서 죽고, 굶어서 죽고, 그랬어."

 

"그래요, 이 분 말씀이 맞아요. 어차피 죽음이란 누구나 겪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극복해야할 슬픔이라구요."

 

"그래, 이 양반들 말씀이 맞아. 난 친구가 세상 떠났을 때 조문을 못 갔어. 그날따라 온몸이 여기저기 쑤시더라고. 물론 가고 싶었지만, 나도 곧 뒤따라갈 것 아닌가? 자네들도 죽어봐서 알겠지만 죽음 이거, 별거 아니야."

 

우리 셋은 길을 걷고 또 걸었고, 예전에 그들이 살았던 곳에서는 대통령이 한 번 바뀌었다.

 

많은 영혼들이 방영*에게 들려준 얘기를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 방영* 자신도 더 이상 내게 화내지 않는 걸 보면 그런 얘기들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방영*이 그런 모습을 보이자 다른 영혼들은 채혁*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느 날 쭈뼛거리며 다가온 영혼은 자신도 은하계 지구행성의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했다.

 

"나도 친구를 피한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운동권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얼굴 좀 보자고. 감옥에서 나온 모양이었어요. 나하고 가깝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전화가 무척 반가웠어요. 그런데 약속이 있던 날, 한 가닥 걱정이 피어올랐지요. 그 친구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애썼다고 하고 싶은데, 그 친구가 빈정거리면 어떡하나? 만약 경제적 하소연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그런데 그날따라 속이 좋지 않더군요. 나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어요. 갑자기 배가 아파 못 나가겠다고, 새로 약속을 잡자고. 그 친구는 익숙한 투로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다시 연락은 없더군요. 그래요, 그 친구가 오해했을 수 있어요. ……맞아요, 그 친구와의 만남을 꺼렸던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날 배가 아팠어요. 그리고…… 우리가 만나서 사이가 안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우리의 산책이 멀리까지 알려졌는지, 다가오는 영혼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러자 영혼들은 마치 더 많은 변명을 듣게 해주려는 듯, 우리에게 일언반구 묻지도 않고 자신들의 변명을 스스로 문답하며 지나갔다. 이제 방영*은 그저 웃고만 있었고, 채혁*도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어릴 때 엄마가 동생을 잠깐 보고 있으라고 했어요. 아기인 남동생은 엄마가 나가자마자 빽빽 울기 시작했죠. 엄마가 가게에 물건 사러간 그 잠깐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어요. 난 진땀이 나고 짜증이 났어요. 왜 내가, 누나라는 이유만으로, 만날 동생을 돌봐야 하죠? 그래도 난 엄마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였어요.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엄마가 가끔 치는 피아노가 있는 골방에 들어갔죠. 여름 바람에 방문이 쾅 닫혔어요. 남동생은 잠시 울음을 그치더군요.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어요. 안 들렸어요. 안 들렸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아기 울음소리는 절대 안 들렸어요."

 

우리는 그 곁에 서있는 영혼이 이승에서는 아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방영*과 채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걷고 또 걸었고, 다가오는 영혼들은 점점 줄어갔고, 그들이 살았던 곳에서는 대통령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방영*과 채혁*은 한 영혼만 더 만나고는 이만 검은 집과 하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난 영혼은 무척 평온해 보였다. 산책을 시작한 후로 처음이었다.

 

"가을이 오자 집 안으로 풀벌레가 들어오더군요. 집에 들어온 벌레는 밖에 놓아주었지요. 벌레를 무척 징그러워했기 때문에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깼는데 뭐가 얼굴 위로 툭 지나가더군요. 불을 켜보니 귀뚜라미보다 기다란 거뭇거뭇한 벌레였어요. 툭툭 튀며 내게 막 달려들더군요. 나는 등에 식은땀이 다 났습니다. 그 징그러운 걸 두툼하게 말은 휴지로 살짝 붙잡아서 밖에다 놓아주려는데 자꾸 놓쳤어요. 허허, 어쩝니까…… 안타깝지만 잡아다가 변기에 버리고 말았지요. 그만 내가 아까운 생명 하나를 죽이고 말았구나,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승에서는 모든 게 다 헛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기회에 열심이 수행하라고 했었지. 그런데 저렇게 벌레로 태어나면, 안타깝게도 수행을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래, 생사를 벗어난 눈으로 본다면, 벌레의 생은 마감하고 새로 태어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어차피 이승의 모든 게 다 헛되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혼의 말이 온화한 미소와 함께 끝나자, 나는 둘과 함께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6)

방영*과 채혁*은 한적한 곳에 있는 검은 집과 하얀 집에 다시 머물렀는데, 더 이상 비탄의 울음을 삼키거나 울부짖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다음 세계로 떠나도 좋다는 추천을 했고, 위에서는 결정이 내렸다. 오랜만에 한가해진 나는 변명사 게시판에 방영*과 채혁* 건에 대한 소감을 올렸다. 게시판엔 수백만 년 동안 늘 그렇듯이 별 다른 얘기는 없었다.

 

죄책감에 극도로 민감해진 영혼 둘을 '습관화'로 대처했음.

 

조금 아쉬운 느낌에 한 줄 덧붙였다.

 

특별히 민감했기에, 특별히 긴 습관화가 필요했음.

 

바로 그때, 나의 나른한 휴식을 깨뜨리려는 듯 긴급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이 영혼의 변명은 어색함, 억지스러움이 없음. '……습니다'도 곧잘 사용함. 언뜻 들으면 선하고 아름다운데, 진심이 전혀 없음. 죄책감이 극심한 영혼 외에는 접촉 금지 요망. 빠른 속도로 감염 영혼이 늘고 있음.

 

상황이 급한 듯 이내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변명사 역할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이 있어, 이례적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함.

 

그러자 여느 때라면 흐릿하게 보일 곳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영혼의 얼굴이 나타났다. 마치 변명사 생활 2백만 년 만의 문책을 축하한다는 듯, 온화하게 미소 지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