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8) 본문
(8)
그러는 사이 동굴에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있었다. 남자 넷의 합리적인 추측 대신 이제는 그곳에 없는 조유나의 예측이 맞았던 것이다. 한동안 조금씩 줄어가던 물이 다시 늘기 시작했다.
"일단 한 사람씩 올라갑시다."
하사장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조유나를 내보낸 자신의 우선순위를 주장했다.
"그거야 하사장이 조대리 다리라도 만져볼까 하며 도운 거지. 그리고 한 명씩 빠져 나가면 맨 마지막 사람은 어떡해?"
조유나가 나가는 동안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염교수였다.
"제일 무겁고 힘 있는 사람이 밖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위에서 뭔가 내려 보내서 붙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민중기는 사다리꼴로 펑퍼짐한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거운 사람을 가벼운 사람이 어떻게 올려 주겠어요? 아까 조대리 하나 올리는 데도 저와 하사장님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박승호는 자신의 날렵한 신체와 조유나 탈출의 조연, 이 두 가지를 다 강조하는 듯했다. 그런 식으로 한 번씩 더 번갈아 말을 하는 동안 물은 좀 더 밀려 들어왔다. 남자 넷은 몹시 초조해 했다.
자신들은 몰랐지만 그들은 동굴에 들어온 후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염교수는 더 이상 친절하고 점잖지 않았고, 하사장은 여유 있는 대신 유들거렸다. 가장 큰 변화는 민중기가 더 이상 조용하지 않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면 가장 변하지 않은 건 나서길 좋아하는 박승호였다. 물론 그런 정도는 동굴 안에서 더 심해졌지만. 그런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던 무의미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 또한 박승호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두 번째로 발견한 종이 덕분에 그들은 말다툼을 중지하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나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승호가 두 번째로 발견한 종이 역시 노란 봉투 안에 있었다. 말싸움을 하는 그 와중에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박승호가 아니었다면 노란 봉투 안에 있던 종이가 내용이 다른 종이로 바뀌어져 있다는 걸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 거였다.
박승호가 그 내용을 읽자 모두 뭔가 골똘히 생각을 했다. 이윽고 기다리다 못한 하사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모두 녹화되고 있었다는 거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곧 올 테니까 신고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거죠?"
민중기가 동굴에 들어올 때처럼 지겨워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슬슬 문질렀다.
"우리가 신고하고 그러면 인터넷에 동영상이 떠돌고, 뭐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야 살만큼 살았지만."
염교수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대뜸 찬성을 했다.
"그러지요, 회장님. 동굴에서 나간 다음에야 뭐 하러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겠습니까? 동굴 밖도 바쁜데 말입니다. 하하, 하하하."
하사장은 여유롭게 웃었다.
"제가 밖에 나가는 대로 여행사며, 조대리며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따로 메일이 없으면 별일 없는 것으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박승호는 이 여행에 참가했을 때처럼 깍듯한 말씨를 썼다. 그러자 민중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