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8) 본문

글/단편소설

귀정굴 탈출기 (8)

조용한 3류 2015. 2. 4. 12:14

(8)


그러는 사이 동굴에는 예상치 못한 변화가 있었다. 남자 넷의 합리적인 추측 대신 이제는 그곳에 없는 조유나의 예측이 맞았던 것이다. 한동안 조금씩 줄어가던 물이 다시 늘기 시작했다.


"일단 한 사람씩 올라갑시다."


하사장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조유나를 내보낸 자신의 우선순위를 주장했다.


"그거야 하사장이 조대리 다리라도 만져볼까 하며 도운 거지. 그리고 한 명씩 빠져 나가면 맨 마지막 사람은 어떡해?"


조유나가 나가는 동안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염교수였다.


"제일 무겁고 힘 있는 사람이 밖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위에서 뭔가 내려 보내서 붙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민중기는 사다리꼴로 펑퍼짐한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거운 사람을 가벼운 사람이 어떻게 올려 주겠어요? 아까 조대리 하나 올리는 데도 저와 하사장님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박승호는 자신의 날렵한 신체와 조유나 탈출의 조연, 이 두 가지를 다 강조하는 듯했다. 그런 식으로 한 번씩 더 번갈아 말을 하는 동안 물은 좀 더 밀려 들어왔다. 남자 넷은 몹시 초조해 했다.


자신들은 몰랐지만 그들은 동굴에 들어온 후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염교수는 더 이상 친절하고 점잖지 않았고, 하사장은 여유 있는 대신 유들거렸다. 가장 큰 변화는 민중기가 더 이상 조용하지 않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면 가장 변하지 않은 건 나서길 좋아하는 박승호였다. 물론 그런 정도는 동굴 안에서 더 심해졌지만. 그런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던 무의미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 또한 박승호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두 번째로 발견한 종이 덕분에 그들은 말다툼을 중지하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나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승호가 두 번째로 발견한 종이 역시 노란 봉투 안에 있었다. 말싸움을 하는 그 와중에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박승호가 아니었다면 노란 봉투 안에 있던 종이가 내용이 다른 종이로 바뀌어져 있다는 걸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 거였다.


박승호가 그 내용을 읽자 모두 뭔가 골똘히 생각을 했다. 이윽고 기다리다 못한 하사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모두 녹화되고 있었다는 거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곧 올 테니까 신고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거죠?"


민중기가 동굴에 들어올 때처럼 지겨워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슬슬 문질렀다.


"우리가 신고하고 그러면 인터넷에 동영상이 떠돌고, 뭐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야 살만큼 살았지만."


염교수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대뜸 찬성을 했다.


"그러지요, 회장님. 동굴에서 나간 다음에야 뭐 하러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겠습니까? 동굴 밖도 바쁜데 말입니다. 하하, 하하하."


하사장은 여유롭게 웃었다.


"제가 밖에 나가는 대로 여행사며, 조대리며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따로 메일이 없으면 별일 없는 것으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박승호는 이 여행에 참가했을 때처럼 깍듯한 말씨를 썼다. 그러자 민중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