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봄꽃이 늘 그렇듯 (1) 본문

글/단편소설

봄꽃이 늘 그렇듯 (1)

조용한 3류 2014. 12. 28. 12:49

2008년 이른 봄에 쓴 글입니다.



봄꽃이 늘 그렇듯



저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새벽까지 살아 있던 제가 어쩌다가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지금 죽은 상태 같습니다. 근데…… 죽은 자가 어떻게 말을 하냐고요? 글쎄요……. ‘내 이름은 빨강’을 보면 모든 게 다 말을 하던데요? 그림 속의 개, 나무까지도. 허허, 농담이구요, 대충 넘어 가지요. 산 자들은, 남아 있는 이들은 여유가 없나 봅니다.


조금씩 기억이 납니다. 새벽에 차를 몰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앞에 뭔가 허연 게 나타나더니 차가…… 그러곤 생각이 돌아오니 제가 보이더라고요. 꿈인가 했지요. 제가 좁은 칸 안에 누워 있고 모습도 깔끔하지 않더군요. 주변을 보니…… 병원 안치실 같았습니다. 음…… 이런 류(類)의 얘기를 재수 없다고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군요. 누구나, 언젠가는 겪을 일을 굳이 어둡게 그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아직 특별히 어두운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한 10년 됐나요?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요. 새벽 3시가 돼서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사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저는 경차를 몰고 그쪽은 그랜저를 몰았지요. 앞에 허연 것이 갑자기 보여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상황이 끝나지 않고 차가 돌기 시작하더군요. 그것도 위아래로. 당황하고 놀란 것보다 짜증이 나더라고요. 빨리 집에 가서 잠시 눈 붙이고 또 출근해야 하는데 이 귀찮은 일이 생겼으니까요. 그런데 차가 한 번 뒤집어지고도 계속 도는 겁니다. 짜증난 상태에서 그냥 멍한 상태로 가더군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끝나기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 그때는 손목이 유리 파편에 살짝 긁힌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차의 후드에서는 연기가 나고 문도 안 열렸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지는 않나봅니다.


세상은 생전과 별 차이 없습니다. 약간 누런빛이 떠돌고, 바랜 느낌을 준다 할까요. 저를 데리러 온 다른 존재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생전에 읽은 임사체험 내용처럼 살아온 날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지나가지도 않고. ‘타나토노트’나 ‘사자(死者)의 서(書)’가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군요. 이제부터 시작인가요?


불가(佛家)에서는 죽은 다음부터 다시 생을 받을 때까지를 중음신이라고 부르지요. 그 세상을 중음계라 하구요. 어느 스님 말씀이 중음신은 아이큐가 700이 된다 하더군요. 세상의 때가 벗겨지니 모든 게 제대로 보이나 봅니다. 불교에 비우호적인 분들은 뭔 X소리냐,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당부 드리지만 산 자의 여유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직 특정 종교에 편향되게 말을 한 건 없습니다.


그냥 걸어 가다가 위로 힘을 주니 몸이 붕 뜹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뜨지는 않고. 몸이란 표현이 이상하지만 제가 아직 이승의 언어밖에 모릅니다. 처음 배영을 배울 때 몸이 뒤로 뜨는 느낌과 비슷하다 할까요? 나름대로 힘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 머리보다 조금 위로 길 같은 게 있네요. 그냥 길 위로 몸이 달려집니다, 마치 가파른 내리막을 달리는 것처럼. 아스팔트는 아니고 두터운 플라스틱 위를 둔탁하게 달리는 느낌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새로운 상황이 신기한 나머지, 제가 이승에 남겨 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습니다.


이건 전에 읽은 임사체험과 비슷한 것 같군요. 죽었다고 서글프고, 떠났다고 원통한 그런 감정 별로 없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저기 보니 낯익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음…… 손아래 동서입니다. 저 때문에 일찍 퇴근했나요? 이런, 벌써 저녁이 되어 가는군요. 어쨌든 저 친구를 따라가면 이승에 뭘 남겨 둔 건지 알 수 있겠지요.


아, 제 사진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증명사진이 아니고 여행 가서 혼자 찍은 사진이네요. 기왕이면 멋있는 옆모습으로 해주지. 갑자기 기분이 묘해집니다. 처가 식구들인가 봅니다. 기억납니다. ……아내입니다. 아내가 물에 젖은 솜처럼 처져 있네요. 중얼중얼 넋 놓고 혼잣말을 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눈 녹듯, 빠르게, 정말 빠르게 기억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뭐, 이런 류의 얘기도 뛰어넘지요. 산 사람은 다 살게 되더라고요……. 몇 번 확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소 힘들긴 하겠지만 남긴 재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만일을 대비해 유언도 써놓은 것 같으니까. 그리고 제가 불효자인지 팔순이 훌쩍 넘으신 어머니 걱정은 안 합니다. 그 정도 내공은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밟혀, 편히 떠나지 못하게 할 자식이 저는 없습니다. 무자식상팔자라…… 허허, 맞는 말이군요. 


어? 저 친구가 여기 오다니. 별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거든요. 음…… 하하.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니 상황이 이해됩니다. ……그냥 밖으로 나가지요. 말이 통하면 간단하게 몇 마디 인사라도 하고, 갈등이 있을 부분에는 쐐기를 박고, 그리고 내게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정말 신신당부하고 싶은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전혀 안 가 본 세상을 혼자서 맞이해야 한다니 좀 아득해집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서 걱정이 되겠구나, 하고 불쌍해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뿌린 건 제가 거두어야지요. 중1 때 처음으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려운 일 있으면 제우스신에게, 아폴론신에게 빌었습니다. 두루두루 아주 무식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유일하게 A+ 받은 과목이 인도종교입니다 (참고로 저는 이공계 출신입니다). 물론 신을 찾는 데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요. 그렇다고 별로 방황도 하지 않고 그냥 남들 따라 특정 종교의 사원으로 가버린 걸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게 혀를 차시는 당신께서는 진정 신을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런 적이 있기는 하나요?


예전에 읽은 소설에서는 사람이 떠날 때가 되면 그런 걸 떠올리더군요. 어릴 때 놀던 여름날 고향 시냇가,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나보냈던 하얀 얼굴의 소녀, 아니면 수은등 아래 비에 젖은 아스팔트길을 함께 걸었던 첫사랑…….


저는 멀리, 아주 멀리 가고 싶은 생각만 듭니다. 얼마 전에야 업무상 출장 말고 관광을 가 봤습니다. 그렇게 되었지요. 제가 배낭여행 세대도 아니고, 유학을 갔던 것도 아니어서 편하게 외국 구경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위스의 인터라켄, 오스트리아의 잘쯔캄머굿, 뉴질랜드의 퀸스타운…… 참 좋더군요.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하하, 모르지요. 대한민국에, 그것도 복작복작되는 대도시에 살게 해달라고, 밤마다 빌고 빌어서 이렇게 한평생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영혼은 날 수 있을까요? 난다면 무협지에서 보듯 겅충겅충 뛰는 건지, 슈퍼맨처럼 씽씽 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