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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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단편소설

어느 연구소 이야기 (3)

조용한 3류 2017. 8. 31. 23:59


(3)


“교수님들도 행정 업무에 대한 불만이 높더라고요. 그래도 연구소에는 행정 지원 인력이 많지 않나요?”


“구매 업무같이 일반적인 것은 연구소가 잘 되어 있지요. 그런데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풀리는 과정에서, 기술 관련한 부분은 주로 연구소들이 맡아 하게 되거든요.”


나는 잠시 PD에게 정부 부처, 과학재단 같은 연구관리 기관, 그리고 연구소의 역할에 대해 설명을 했다. 기술기획에서 굵직한 내용을 채우는 것은 산․학․연 전문가 몫이지만, 남은 뒤처리는 결국 정부산하 기관인 출연연구소 몫이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요구하는 문건도 꽤 있어요. 예를 들어, 신임 장관의 현황 파악을 위해 각 과제마다 몇 장씩 서류를 작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 부처에서 지원하는 연구비가 몇 천억인데 과제가 얼마나 많겠어요? 장관한테 올라가는 몇 장짜리 보고서에 그냥 두툼한 자료로만 첨부될 뿐인데. 게다가 그런 건 꼭 금요일 저녁에 연락이 오더군요, 허허.”


“정부에서 세웠다고 시시콜콜 간섭을 하나 보지요? 연구에 문외한인 사람들일 텐데.” 


“연구소 정원이 묶여서 몇 년 동안 연구원 채용을 못 한 적도 있습니다. 과제원도 없는데 어떻게 과제를 수행하느냐고 불만이 쏟아져도, 연구비 주는 부처에다가 무슨 연구이사회에다가, 층층시하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결국 비정규직 연구원 채용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니 연구소장 되려고 장관 집 앞에서 저녁 내내 기다리다 바람 맞았다는 소문이 돌아도 사실처럼 들릴 수밖에요. 또 이삼 년에 한 번 소장이 바뀌면 조직개편이 있고……. 제가 연구소 입소한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해마다 연구실 이사를 했습니다.”


날씨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2월은 겨울이었다. 가져다 준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담배를 물었다.



팀원 평가를 마치니 팀장 회의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휴가를 연말에 몰아낸 연구원들이 많아서인지 꽤 한적해진 사무실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서박사!”


이 분은 다 좋은데 자기 자랑이 과했다. 좋은 성과를 얻은 것을 같이 기뻐하는 건 좋지만, 길 가다 만난 사람을 붙들고 한참동안 어느 저널에 자기 논문이 게재된다느니, 어느 인명사전에 자기가 실린다느니, 국제학회에서 발표했더니 반응이 어떻다느니, 하곤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담배 피우러 가자며 김수성이 붙잡는 바람에 용케 평균보다 빨리 탈출할 수 있었지만.


“뭔 얘기를 그리 다정하게 해?”


“자기 논문이 억셉트 됐다고. 인명사전에도 실린다던데…….”


“그러면 뭐해? 과제 내용에도 없는 거 혼자 몰래 하고 있는데.”


“응? 아니, 과책이 그걸 용납하나?”


“우리 팀장님이 머리를 썼지. 논문에 자기 이름도 올리고, 지금 하는 과제 잘못되면 도망갈 곳도 만들고.”


김수성과 나는 몇 년 전에 기술기획을 위한 태스크포스 팀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누구는 신임 단장이 젊은 연구원들을 이용해서 자기 세력을 구축한다고도 했지만, 전임 단장의 폐해를 고치고 상식이 통하는 연구단을 만들겠다는, 다소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철없던 우리는 애를 썼었다.


담배꽁초로 꽉 찬 재떨이를 위아래로 한 바퀴 돌려 비우는 사이, 김수성은 옆 자리로 다가앉으며 물어왔다.


“내년 과제 수주는 잘되어간대요?”


“잘되는 것 같아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요즘은 정부 부처로부터 사랑받고 있지 않나?”


“그게 우리가 잘해서인가? 그 국장이 우리 단장과 고교 동창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우리가 태스크포스 팀을 이루던 3년 전에는, 그 연구단은 결과를 내놓는 것 없이 취미 활동만 하는 곳이라는 혹평이 담당 국장에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잘되어가던 기술기획은 여름부터 꼬이기 시작했고 과장의 차가운 눈초리와 우리의 계속되는 요구 속에서 담당 사무관은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3년 전에 그 친구도 지금 사무관처럼 팍팍 밀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들은 미지근했다고 하지만 난 그 친구가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생각해.”


내가 변호 아닌 변호를 막 시작하려 할 때, 누군가 흡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여기들 있었네. 뭔 얘기를 그리 속닥거려? 난 어제 계속과제 평가 다녀왔더니 무척 피곤하구만.”


“송박사님, 어제도 늦게까지 술 드신 것 아녜요?”


“아니, 김박사 무슨 그런 말을. 나 조용히 살기로 했어. 얼마나 바쁘다구. 근데 요즘 모두 왜 그러는 거야?”


송박사는 예의 큰 몸집을 건들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흡연실은 담배 피우지 않는 사람들도 가끔 들려 연구소 돌아가는 정보를 주고받는 장터목 같은 곳이기도 했다. 


“교수들이 연구비 따려고 너무 극성이야. 우리는 연구비를 따야 월급이 나오지만 그들은 학교에서 월급이 나오잖아? 학생이란 인력도 넘치고. 아니, 연구소는 왜 이리 연구비를 많이 신청하냐고 그러는 거야. 자기네 같으면 3분의 1이면 된다나?”


PBS(Project-Based System) 하에서는 모든 인건비가 연구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3억 연구비에서 인건비와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빼고 나면 순수 연구비는 1억 정도였다. 그러니 연구비로 따지면 연구소 3억은 학교 1억과 비슷한 셈이었다. PBS는 연구소에 일정한 연구비를 주고 알아서 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할 과제들을 제안해서 경쟁을 거쳐 연구비를 확보하는 식이었다.


“까짓 것 송박사님 내공으로 눌러 버리시지요.”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붙였다. 송박사는 굵고 검은 안경테 너머로 나를 넘겨보고는 히죽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교수도 연구비를 많이 따와야 큰 소리 칠 수 있다는 건 잘 알지. 장비도 있고 연구수당도 주는 실험실에 애들이 몰리니까. 우리 대학이 올해 얼마를 유치했소, 라고 자랑도 하고. 그건 좋은데, 소화할 수 있는 이상으로 많은 과제를 수주하는 거야. 그러니 학생 하나가 과제 하나를 맡는다는 말이 나오지. 가까운 교수들끼리 서로 평가에서 봐 주고.”


“저번에 평가 들어가 있는데 어느 교수가 전화를 했어, 자기 대학 과제를 좀 밀어 달라고. 누가 평가위원 명단을 흘린 거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김수성도 말을 거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부탁을 들어도 확실한 근거 없이 밀어주지는 않았다. 그건 전문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과제수주 관련한 로비 소문이 꽤나 떠돌았고, IMF 위기 이후 봇물처럼 일었던 벤처 창업과 관련한 안 좋은 얘기도 많았다. 어느 분 말대로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보면 이제 우리나라도 연구비가 꽤 되긴 되나 보다. 그런데 송박사의 흥분은 좀체 식지 않았다.


“연구 주제는 왜 그렇게 뻥을 튀기는 거야? 몇 만 원짜리 술에다가 안주 붙이고 분위기 꾸미면 몇 십 만원으로 둔갑하는 거야? 좀 이상해도 남의 분야는 잘 모르니까, 또 잘못 말했다가는 다음번에 자기가 당할 수 있으니까 서로 조심하는 게지.”


술 좋아하는 그이다운 비유였다. 며칠 전 셋이 술 한잔을 하다가 언성을 높였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겸연쩍게 웃고 있었다.


“교수가 무슨 위원회다 강연이다 만날 바깥으로 도는데 신문에는 세계 최초로 뭘 했다고 나오데? 똑똑한 애들이 밑에 많아서인지, 아니면 사기 치는 건지…….”


“송박사님, 그만 하시죠. 천재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씁쓸한 웃음을 띠며 두 사람의 소매를 끌었다. 잠시 후에 우리 부 팀장 회의가 있었다. 계단을 돌며 내려가는데, 갈라지는 곳에서 갑자기 송박사가 나를 붙들었다.


“서박사, 얘기 들었어? 그 부에서 수행하는 그 사업 있잖아, 그거 이번 평가에서 탈락됐다던데?”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그 사업은 부원들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는 큰 과제였는데, 다만 나와 우리 과제원들만 속하지 않았기에 그 쪽 정보에는 좀 어두웠다. 아니, 우리 과제 종료가 반년밖에 남지 않아 실험하고 데이터 분석하느라 남의 일에 신경 쓸 여유도 없었지만. 


문득 지난주의 전화 통화가 떠올랐다. 우리 연구단의 사정을 잘 아는 교수인데, 졸업하는 제자가 갈 만한 자리가 없냐는 얘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이번에 신규과제 평가에 들어갔는데 그 부에서 올린 사업이 있더라고. 근데 내용이 지금 수행 중인 사업과 똑같아. 그 사업도 내가 평가에 참여해서 내용을 알거든. 아무리 요새 잘 나간다고 해도 너무 한 것 아냐? 내용이 없으면 외부에 도움을 받아서라도 채워야지, 이게 뭐야?”


그때 나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며, T부장이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끝을 맺었다. 과제 중복성으로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도 있고 가까운 사이인 T부장한테 물어 볼 수도 있으련만, 그는 나한테 귀띔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