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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5) 길 위의 영혼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죄의식이 예민해진 영혼들은 다소곳이 변명사들의 변명을 들으며 조용히 산책하고 있었지만, 변명하기에 바쁜 영혼들은 자기변명을 들어줄 영혼들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우리 셋을 수군거리며 쳐다보는 영혼들은 많았다. 이게 다 방영*과 채혁*이 몇 날 며칠을 음산하게 울거나 고래고래 울부짖은 덕이리라. 멀리서 빤히 쳐다보던 한 영혼이 서서히 다가왔다. 변명사인 내 눈에는 그의 잘못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방영*과 채혁*에게 간단히 귀띔해주었다. 출장에 동행했던 젊은 부하 여직원을 밤중에 자기 숙소로 불러서 성추행을 했었다고.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는 더없이 불쾌하다는 탄식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슬그머니 다가오던 영혼은 그 탄식만으로도 이미 우리 셋이 ..
(4) 나와는 달리 평범한 영혼들을 만나 무척 한가한 친구를 잠시 방문했다. 그는 산책길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나무 밑에 앉아있었다. 그 옆에선 이곳으로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영혼이 벌써부터 지루한 듯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변명을 담당한 영혼들이 범상치 않음을 알았다. 친구는 나를 위로했다.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근데 난 요새 너무 심심하다. 할 일이 없어. 다들 스스로들 알아서 변명을 하고 있네. 내가 할 일이 없어." 친구는 연민으로 가득 덮인 눈동자만 10년째 껌벅이고 있다고 했다. 참, 나. 하긴 그렇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이들만 담당했으니까. 영혼들이 너무 극에서 극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난 못마땅한 김에 아직도 하품을 하고 있는 영혼에게..
(3) 하얀 나무 집의 채혁*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머리를 하얀 벽에 찧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 두 영혼을 보내고 나면 몇 십만 년 만에 휴가라도 신청해야할 것 같다. "여보게, 그만 찧게나. 돈 3백만 원 안 빌려줬다고 머리를 찧는다면 온몸이 분자형태로 파쇄가 돼도 부족한 죄인들이 많아. 그리고 자네는 돈 빌려달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듣지도 못했어." 채혁*은 내 말이 답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더 머리를 극성스럽게 벽에 찧어댔다. 이 친구는 검은 나무집에 있는 방영*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이봐. 그 사람이 얼마를 언제까지 빌려줄 수 있냐는 메일을 보낸 게 다야. 자네는 3백만 원이 가능하다, 그러나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 꼭 필요하면 다시 연락을..
(2) 방영*은 오늘도 영혼들이 거닐고 있는 길을 벗어나 검은 나무로 된 외딴 집에서 홀로 비탄의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보낸 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만 괴로워하게. 그건 그냥 할 말이 안 떠오르고 직장에서 작성할 서류가 많아서 잠시 미루었을 뿐이네." 물론 나는 항상 부드러운 목소리다. "자식의 죽음을 겪은 친구입니다. 할 말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냥 괜찮으냐고, 힘들지 않느냐고 하면 됐던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그 말 한 마디 할 시간이 없었겠습니까?" 방영*의 얼굴은 쓰디쓴 표정만 남아있었다. 그는 변명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며칠 답이 없자 그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그런 메일을 받고 나서 아무 답장이 없었던 제가 이상했겠지요. 그런..
(1) 2014년 여름에 쓴 거네요. 어디에 응모한 적이 없는, 따라서 별로 수정하지 않은 글입니다. (2) 2022. 11. 15 무엇에 홀린 것처럼 8년 만에, 그러나 1시간 반 만에, 신춘문예 응모할 결정을 했다. 두고두고 생각해볼 일이다. 처참한 연말이다. 변명사(辨明士) (1) 나는 남을 변명해주는 일을 한다. 사람들이 이승을 떠난 지 며칠이 되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때 나는 그들을 변명해준다. 그들이 이승에서와 달리 극심하게 죄의식을 느끼는 건 심판을 두려워해서라기보다는 그동안 이승의 먼지에 덮여 있던 본성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무수히 사람들을 죽이며 권력을 행사한 자나 남의 피를 빨아 부(富)를 세운 자, 그리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여 명성을 얻은 자 들 중에는 여전..
(5) 어제 집에 올 때와 별 차이 없는 제안서가 만들어졌다. 나는 잠시 눈을 붙인 후에 아예 제출까지 하고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침이면 늘 그렇듯 일찍 일어난 녀석은 발코니의 의자에 앉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다. 난 피곤한 눈두덩을 찬물로 적셨다. 어느 층인지 모를 남자의 가래..
(4) 살금살금 위층으로 올라가 문에 살며시 귀를 댔다.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다시 조용히 내려와 살며시 문을 닫았다. 거실과 마루에서는 웅성거림이 여전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아파트를 한 바퀴 주욱 돌았다. 아랫집은 전혀 불빛..
(3) 막 서쪽으로 떨어진 해와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 탓으로 발코니는 몹시 후텁지근했다. 그리고 그 뜨거운 공기 속에는 예의 텁텁함이 속속들이 스며 있었다. 난 집안을 한 바퀴 돌며 창문을 열고나서 라면 끓일 물을 얹었다. 스프를 꺼내고 봉지째 라면을 네 조각으로 나누고 있을 때 전..
(2) 동네를 쩌렁쩌렁 울린 전기톱 소리와 뭔지 모를 그 텁텁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계획했던 만큼 에어컨도 켜지 않고 일을 했을 것이다. 오후 내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지만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는커녕 이미 있던 걸 다듬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었다. 오늘 아침 아내의 예민함을 탓할 ..